[남정욱의 종횡무진 경제사] 숫자만 '대약진' 된 마오쩌둥式 경제개발…굶주림은 일상이었다

입력 2023-12-06 18:05   수정 2023-12-07 00:10

6·25전쟁 당시 맥아더는 중국군을 농민군이라고 불렀다. 사람 깔보는 게 취미였던 맥아더의 고질병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소생의 생각은 좀 다르다. 그는 중국 혁명의 본질이 농민 반란이라는 사실을 이해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해서 맥아더에게 중국과의 전쟁은 농민들과의 싸움이었고 나름 정확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1921년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창당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소련 첩자에게 200위안을 받아 썼을 때부터 마오쩌둥은 크렘린에 쥐여살았다. 제자를 가르치려는 혁명 스승의 주문은 집요했다. 마르크스주의의 교리에 따라 스탈린은 줄기차게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주문했고 이는 마오에게 스트레스의 원천이었다.

게다가 중국에 파견된 코민테른의 군사 고문관 오토 브라운은 스탈린의 말이라면 똥을 된장이라고 해도 믿는 인간으로 그는 스탈린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해 마오를 노이로제 상태에 빠뜨린다. 전술 회의에서 기어이 마오는 폭발한다. “눈을 까뒤집고 봐라. 중국에 무슨 프롤레타리아트가 있다는 말인가.” 이어 마오의 정치적 싸움 개 덩샤오핑은 가장 젊고 혁명적인 병사를 데려오라고 지시한다. 불려온 청년 병사는 낫을 들고 있었고 거기에 쇠꼬챙이를 덧댄 자신의 참신함을 자랑했다.


덩샤오핑은 브라운에게 물었다. “댁의 눈에는 저게 프롤레타리아트로 보이냐.” 이 에피소드는 실화가 아니라 마오파와 반대파 사이에 오간 논쟁을 짜깁기해 재구성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마오가 농민을 무시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 자신 역시 농민이었던 마오는 그들을 신뢰했고 사랑했으며 중국 혁명의 동력이 농민인 동시에 자신이 건설할 신(新)중국의 미래가 농민에게 달려 있음을 알고 있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 비로소 마오는 악몽에서 해방된다. 이때부터 상황이 오묘해진다. 크렘린의 새 주인 흐루쇼프는 마오에게 자애로운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마오는 학생 노릇을 두 번 할 생각이 없었다. 마오에게 이제 소련은 한 수 배울 스승이 아니라 경쟁자였다.

흐루쇼프가 15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겠다고 하자 마오는 같은 기간 안에 영국을 넘어서겠다고 공언한다. 1957년 말 시작된 중국의 닥치고 경제 개발 ‘대약진 운동’이 힘차게 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그런데 뭔 돈으로? 신중국의 진정한 자본은 정확한 숫자조차 알 수 없는 거대 인구, 농민이었다. 마오의 계획은 심플했다. 일단 춘경기가 오기 전 농민들을 동원해 대규모 관개 사업을 성공시킨 후 농촌이 풍요로워지면 이 인력을 공업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이 덕분에 1958년 1월 중국에서는 여섯 사람 중 한 사람이 땅을 파고 있었다. 3년 고생하면 1만 년 행복하다는 대국다운 슬로건 아래 1억5000만위안이 투입되고 노동 일수는 60만 일에 달했지만 1962년 프로젝트가 폐기될 때 중국이 얻은 관개 토지 총면적은 0㏊였다. 서둘러 일을 진행하다 보니 사방에서 계산 착오가 발생한 것이다.

마오는 여전히 농민들을 신뢰했다. 이번에는 동네마다 제철소를 세운다는, 박태준도 울고 갈 엄청난 발상으로 홈메이드 용광로를 전국에 50만 기나 만들어 가동했지만 아무 쇠나 녹여서 굳히면 강철이 된다는 것 역시 대국다운 발상으로 제작된 ‘똥쇠’가 공업에 투입돼 대량으로 불량품을 양산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최악은 중국을 거대한 집단 공동체로 만들어 버린 인민 공사다. 담요 한 장 빼고 모든 것이 공동 소유가 된다는 소문에 농민들은 자신의 가축을 잡아먹고 저축을 헐어 미친 듯이 물자를 써댔다. 나중에는 씨앗 종자까지 먹어 치웠는데 이는 수천 년 중국 농업사에 유례없는 일이다.

‘대약진’은 다른 방면에서 성사된다. 목표치를 놓고 졸개들이 충성 레이스를 펼친 끝에 목표량이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며 ‘숫자의 대약진’을 달성한 것이다. 1958년 2월 허난성의 ㏊당 밀 수확 목표량은 5200㎏이었다. 이게 부풀어 오르더니 연말에는 ㏊당 37.5t이라는 허무맹랑한 수치로 올라갔다. 날마다 기록을 경신하는 보고서가 올라왔고 감동한 마오는 존재하지도 않는 서류상의 잉여 생산물을 어떻게 써야 할지 행복한 고민에 잠을 설쳤다.

철강도 마찬가지. 대약진 운동 전 중국의 철강 생산량은 535만t이었다. 1958년 초 목표는 620만t이었지만 그해 말 상향 조정된 수치는 1200만t이었다. 이 수치를 맞추기 위해 농민들은 멀쩡한 농기구를 고로에 던져 넣었다. 대약진 운동 결과 굶주림이 일상이 됐고 5년 동안 한국 전체 인구에 육박하는 인명이 증발했다. 농민을 위해 벌인 사업들이 농민에게 살인적인 위해(危害)로 돌아온 셈이다. 맥아더가 간파한 대로 중국은 기본적으로 농민 사회고 이는 지금도 별로 변함이 없다.

1995년 기준 중국의 농업 인구는 8억6000만 명으로 57억 당시 세계 인구의 무려 15%가 중국 농민이었다. 이들의 삶은 참담하다. 2005년 기준 연평균 소득은 우리 돈 40만원이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었고 3억 명에 달한다는 이들 농민공의 하루 품삯은 2만원 안팎에 불과하다.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으로 이제는 생활고에 매혈까지 한다는 보도다. 21세기판 ‘허삼관 매혈기’를 보면서 국가가 가장 먼저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최소한 그게 국민의 허기를 외면하고 국제 사회에서 군사 패권 경쟁을 벌이는 일은 아닐 것이다.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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